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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부록 ①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큰스님께서 동서고금의 여러가지 실례를 들면서  자세하게 윤회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만, 좀 더 과학적이며 현실적인 윤회의 확증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에 관한 두 책 -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와 [한번 이상 사는가?] - 의 내용을 짤막하게 간추린 것을부록으로 엮어 소개합니다.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는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교수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윤회에 대한 사례를 1973년까지 약2,000건을 수집 연구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스무 가지를 수록한 것입니다.  이 책은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아이들 上,下]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한번 이상 사는가?]는 영국 BBC방송의 프로듀서인 아이버슨 씨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브록샴 씨가 소장하고 있던, 40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전생기억에 대하여 조사 연구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여섯 번의 전생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에반스 여사의 전생을 추적 조사하여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을 기술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번의 전생만 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윤회하는 인생을 이해하여 이웃과 화목하며,  모든 미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제 1 화  전생의 춤을 추는 스완라타
  
  불교의 발생지이며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인도에는 종교적으로 전생이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에 대한 조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직접 조사한 사례들이다.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완라타 미슈러는 1948년 3월 2일 마디아프라디슈 주(州)의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그녀를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세살 때였다. 1971년 11월의 어느 날,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한 지방도시 중류 가정집 응접실에서  스완라타가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을 보았는데 곁에는 이 집의 주인인 스완라타의 아버지도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춤의 율동에 따라서 벵골어의 노래가 흘러나왔다.그것은 벵골 지방의 가을추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스완라타가 처음으로 이 춤과 노래를 보여준 것은 그녀가 대 여섯살 때였다. 그런데 춤을추지 않고 노래만 생각해 내거나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거나 하지는 못하고,  반드시 양쪽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물세살의스완라타는 젊은 나이로  챠타라푸울 지방대학의 식물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지만 벵골어는 한 마디도 이해하는 것이 없었다.  인도에는 열 가지도 넘는 언어가 있고  그녀는  힌두어(語) 지역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결국 스완라타는 다섯살 때부터 이 노래와 춤을 추어 왔지만, 전생기억의 상태가 아니면 이것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첫번째 특징으로  그녀는 두개의 전생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벵골 지방과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두 곳에서두개의 서로 다른 전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이 벵골의 춤은 물론 벵골 지방에서 생활한 전생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특징은, 대개의 경우 열살쯤되면 전생기억을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성장한 후에도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스완라타가 마디아 프라디슈 주에서 살았던  '비야'로서의 전생 이야기는다음과 같다.
  스완라타는 1948년 3월 2일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세 살 반쯤되었을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는 도중에  카트니 시(市)를 지나가다가 스완라타는 문득 "우리 집 쪽으로 가줘요"라고 말했다. 이들이 카트니 시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셨는데 이때에 또 그녀는 자기 집에 가면 더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아버지 미슈러 씨는  딸아이의 말에 난처해졌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는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스완라타는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카트니 시의 파사크 집안의 딸인데  이름은 '비야'라고 하며결혼해서 아들이 둘 있었다고 말하더니 그들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스완라타는 가끔씩  이렇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행동은 퍽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몇년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가 대여섯살쯤 되었을 때 앞에서 말한춤을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추어 보였다. 그리고 춤과 함께 벵골에서의 전생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1958년, 그녀가 열살 때,  가족이 챠타라푸울 시(市)로 이사를 했는데,이때 우연한 계기로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스완라타는 어버지와 함께 어그니호트리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교수의 부인이 다과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있던 스완라타가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부인을 지긋이 바라보는데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을 담은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은 괴이하게 생각했다.인도에서는,  특히 계집아이는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친밀감을보이지 않도록 엄격히 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완라타가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나는 카트니 근방에 살던 파시크가(家)의비야예요."
  사람들은 놀랐다.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응시하는 부인에게 스완라타는 이어서 말했다.
  "부인과는 티롤러 촌(村)의 결혼식에 함께 갔었지요…."
  교수 부인은 비야와 함께 시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과  그때 화장실을 찾느라고 애먹었던, 아주 오랜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의 농촌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데  도시에서 자란 두 사람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줄 알고 온 집 안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스완라타의 부친은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딸이 하는 말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그녀가 하는 말들을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1958년 9월의 일이다.   스완라타의 나이로 보면 세살 반에서부터 열살 사이에 그녀가 한말들이다.
  "전생에서 그녀는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의 딸 비야였다.  두명의 아들이 있고 이름은 크리슈나 다타와 시빈 다타라고 했다.   파사크 가의주인은 하리 라르 파사크이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었다.  목의 병으로죽었다.  자바르푸울의 나피 가(街)에 있는  S.G. 바브랫드 의사에게서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본격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이사건이 있은 지 반년 후인 1959년 3월에  이 방면의 연구가인 버너어지에 의해서이다.  그는 스완라타에게서 전생 이야기를 듣고 카트니 시의파사크 가를 찾아나섰다.  오직 스완라타의 말만을 의지하여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파사크 가는 백색 건물로 문은 검은색이고 쇠빗장이 걸려 있다.  앞문에는 석판(石板)이 깔려 있다. 집 뒤에는 여학교가 있고 가까운 곳에있는 석회 공장과 철도 선로가 집에서 보인다.   파사크 가에는 석회를바른 방이 넷 있고, 다른 방은 별로 고급으로 꾸며놓지 않았다."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비야의 제일 큰 남동생인 프라서드 파사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버너어지 씨는 스완라타가 말하던 전생의 이야기들이 그녀 자신의 전인격(前人格)이라는비야의 생애와 꼭 부합하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비야는 카트니 시북쪽에 있는 도시 마이하르에 사는 친타미니 판데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으며 1939년에 사망한 것 등을 프라서드 씨로부터 알아냈다.
  진정 이것은 믿기 어렵지만  스완라타가 세살 반 무렵부터  얘기했던것은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버너어지 씨는 파사크가를 방문해서 스완라타의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고 상세한것을 보고는 그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한 가지 실험을 시도 하였다. 이 해 여름 프라서드파사크 씨는 아무런 예고없이 챠타라푸울의 미슈러 씨를 방문했다.  스완라타는 부친 미슈러와 함께 이 낯선 방문객과 만났다.
  스완라타는 "하리 라르 파사크" 하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비야의 부친의 이름과 프라서드의 이름을 뒤섞은 것이었다. 프라서드가말이 없자  그녀는 정확하게 그를 기억한 듯 다시  '바브'라고 불렀다.그것은 가족끼리 부르던 그라서드의 애칭이었다.
  카트니에 돌아온 프라서드는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마이하르의 비야의유가족에게 전했다. 그러고서 약 한달 뒤에 비야의 남편과 아들을 비롯한 열한 명의 사람들이 챠타라푸울의 스완라타를 만나러 갔다.  스완라타는 그곳에 찾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지적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인 친타미니의 차례가 되자그녀는 부끄러운 듯한 태도로 "당신을 카트니와 바이하르에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타미니가 40여년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찍은사진을 보여 주자 그중에서 소년 시절의 친타미니를 가리켰다. 또 아들을 보자 "내 아들 줄리"라고 정확히 이름을 대어 지적했다.   이전에는기억이 혼란해서 아들의 이름을 크리슈나 다타라고 불렀지만 이 때에는아들을 보고 정확하게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이 만남에서 스완라타는 한 가지 사건을 말했다. 그것은 비야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편인 친타미니가 자기가 상자 속에 넣어둔 돈 1,200루피를 훔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난 사건은 비야와 남편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만남이 있었던 같은 해 여름, 스완라타는 비야의 생애와관련이 있는 고장으로 옮겨가면서 전생 일을 확인해 보였다. 먼저 카트니의 파사크 가에 갔을 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제들은물론이고 친척, 가정부 등 모두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야 생전의 사실 두 가지를 그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과거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파사크 가의 집밖에 달려 있던 난간인데 이것은 비야가 죽은 뒤에 집을 개조하면서 없어졌다.   또 하나는 마당에 있던 나무에 대해서 "왜 그 나무를 베었는가?" 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 나무는 이, 삼 개월 전에 태풍으로 뿌리채 뽑혀버려서 아무도 거기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버린것이다. 그리고 파사크 가에서 '바다'라는 과자를 내놓자 그녀는 "예전에 잘 먹던 과자다"라고 했다.   사실 비야가 좋아한 과자였던 것이다.그러나 '바다'는  챠타라푸울의 미슈러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과자였다.
  또 바이하르의 시댁에서는  마흔 명쯤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을 지적해냈다. 또 비야의 방과 강으로 목욕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비야보다 먼저 사망한 시누이의 이야기도 했다. 티롤러 부락은 비야가 죽기 직전에 있던 곳이데,  여기서도 비야가 죽은 방을 가리키는 등 비야생전에 있었던  집안 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해서  전생기억의 정확성을보여주었다.
  한편 앞에서 말한 춤과 노래는 벵골지방에서의,  스완라타의 또 하나의 전생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   그녀가 벵골의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것도 비야로서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서너살쯤의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두개의 전생기억이 서로 뒤섞여 혼동되는 듯 싶더니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그녀는 두개의 기억을 따로따로 구별하게 되었다.  벵골에서의 스완라타는 다음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앗삼 지방 지렛트에서 생활하였고  이름은 카무렛슈였다. 그것은 비야의 다음 생애였다. 아홉살까지 살다가 미슈러 가에 환생했다."
  곧, 스완라타의 전생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은비야로서의 전생과 현생의 스완라타와의 중간에 끼어 있는 약 9년 동안이 되는 셈이다.  곧, 다시 말해 비야의 죽음이 1939년, 스완라타의 탄생이 1948년임을 생각하면  그 중간의 9년간이 카무렛슈의 생애인 셈이다.  (비야의 죽음이 1939년인 것은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방문한1959년 3월에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중간적 전생이 9년 정도라는 그녀의 주장은 실제의 사실과 잘 부합된다. 또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에 대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비야에 비하면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래도 지렛트 지역의 지리적특성에 대한 그녀의 말은 현실적인 지렛트의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무렛슈가 지렛트의 어느 집의 누구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앗삼 주의 지렛트 지구가 1947년 인도의 파키스탄 분할에의해 현재는 방글라데시에 편입되어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스완라타의 춤'은  벵골 지역의 앗삼주에있는 지렛트에서의 그녀의 전생에 의거한 춤이라는 것이다. 스완라타가 보통 사람들이 노래나 춤을 배우는 것과 같은 방법, 곧, 통상적인경로를 통해서 '스완라타의 춤'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완라타가 자라온 마디에 프라디슈 주는 힌두어를 쓰는 곳으로서 벵골지방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러나 그녀가 춤을 출때에 부르는 노래는 벵골어인데 그녀의 양친은 물론이고 친지중에도 벵골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노래가 벵골어라는 것이 판명된 것은 1963년으로 열다섯살 때이다. 벵골 출신의 파르 교수가 그 춤을 보고 이를 기록한 후조사해 보니  그녀가 부르는  세개의 노래 중 두개는 벵골 출신의 시성(詩聖) 타골의 시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노래는 인도에서 1940년 이후 영화, 라디오,  레코드에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스완라타는 열살이될 때까지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춤을 보여 준 것은대여섯살 때의 일이다.)
  파르 교수는 그 뒤 타골 자신이 설립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스완라타가 부르는 노래와 춤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곡조나 춤이 그녀가하는 것과 꼭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봄의 축제가 열리고 있고 그 때에는 스완라타의 춤의 일부분이 소녀들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지렛트에 살고 있을 때 벵골어의 노래와 춤을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배웠다"고 하는 말은  그녀의 말대로 전생에 지렛트이 카무렛슈라면 납득이가는 이야기이다.
  현세의 스완라타가 살고 있는 미슈러 가(家)와 전생의 비야가 살았던파사크 가(家)의 양 집안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2년이 지난1961년, 스완라타가 열 세살일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그녀를 처음만났다. 그 때 전생 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파사크의 가족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보이고  그들과 헤어질 때나 만날때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비야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머니 비야'로서의 태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미 장성한 서른다섯살의 아들과열세살의 어린 어머니, 이는 세상에서도 진기한 모자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미슈러 가의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미슈러의 가족들에게도 애정을 갖고 있었다. 스완라타의 경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열살쯤 되면 전생기억이 차츰 희미해지는 많은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1971년에도 '스완라타의 춤'을 보여줄 수 있었던것이다. 그 후 1973년 5월 그녀는 결혼한다고 했다.
  그녀 스스로 두개의 생애에 대한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생애의 일에 생각히 몰입되어 있을 때에는 현재의 일은 잊어버립니다만 그러다가 곧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  나의 마음에는  그것과관련이 있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 전생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만족시켜 줍니다.  요컨대 과거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요소는 그 시점에서의 상황 조건인 것입니다."

 
  
  제 2 화  소생한 후 딴 인격으로 바뀐 자스비아
  
  1954년 인도 무자파르나갈 지방의 라스르푸울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일이다.   그 당시 마을에는 천연두가 나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살 반 되는 자스비아라는 아이도 이 병으로 죽었다. 아이가 죽은시간이 너무 늦은 밤이라 그 부모는 시신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시간이 흘러서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지켜보던두 사람은 문득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작은 유해가 희미하게 살짝 꿈틀거린 것이다. 그러고서 또 유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차츰 꿈틀거리는 동작이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라르의아들 자스비아는 완전히 되살아났다.
  이 사례를 조사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혹시 죽지 않은 것을  잘못알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자스비아는호흡이 정지되고, 입이 열려져 있었고, 항문과 신체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확실한 것이다.
  '부활'한 지 몇 주일이 지나 몸이 회복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자스비아는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바라문이다. 이집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 바라문 식으로 조리한 음식이 아니면 안 먹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이나 옷을 가리킬 때에도 바라문계급만이 사용하는 고상한 말로써 하였다. 무엇보다도 부모를놀라게 한 것은 자기는 자스비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카 소바 라므 차기이고 베디 마을에 산다. 그리로 데리고 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계급과 다른 계급과는 식사 습관에서 조리법까지가 다르게 되어 있는데,  그는 차기 가(家)의 사람으로서 바라문계급이니 바라문 식으로 조리를 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계속 음식을 먹지 않자 그의 부친은 하는 수 없어 한 동네에 사는 바라문 가에요리를 부탁하였다.  자스비아는 결국 가족들의 강압에 의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2년 가까이 바라문 가에서 조리한 음식을먹었다.
  자스비아는 세살 반에서 예닐곱살이 될 때까지는 자라는 동안에 라므로서의 생애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곧 자기는 바라문 가문으로, 베디마을의 샹카의 아들 소바 라므이고  아내는 모르나 마을 태생이며 아들도 있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피이 팔나무가 있고 마을에는 암거(暗渠)의 배수로가 있다고 하였으며,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심히 이야기하였다.  어느 결혼식에서 베디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머리에 부상을 입고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곧 결혼식장에서 독이든 음식을 먹은 탓에 현기증이 심해져 우차에서 떨어졌는데,  자기에게서 돈을 꾸어간 사람이  빚을 면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그 이름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기고 라므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자스비아가 일곱살이 되던 1957년의 일이다.  샤모스크라라는 바라문계급의 여인이 5년 만에 친정이 있는 이곳 라스르푸울 마을에다니러 왔는데,  그녀는 자스비아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바라문 음식을만들어주던 사람과 아는 사이였다. 거기에서 자스비아의 이야기를 듣고찾아갔다. 샤모는 자신이 베디 마을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베디 마을의이야기를 한다는 아이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샤모가 방문했을 때 자스비아는 집에 있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샤모를 보자 자스비아는 "큰어머니!"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샤모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는 베디 마을의샹카 차기의 형이었다.   그러므로 자스비아는, 적어도 그의 말에 의하면,  차기의 아들 라므였던 것이니 그의 말은 맞는 것이다. 얼마 후 베디 마을로 돌아온 샤모는 자스비아라는 기이한 아이가 라스르푸울에 있다는 것을 그녀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와 라므의 부친 샹카 차기에게 전했다.  그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라므의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바 라므는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로 죽었다.그것은 1954년 5월 22일이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자스비아는 라므로서의 사망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밖의 것은 정확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순한 사고사(事故死)로 믿고 있었던 그 죽음을 독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리하여 샹카가 가족을 데리고 며칠 뒤에 라스르푸울에 옴으로써  베디 마을의 차기가(家)와 라스르푸울의 라르 가(家)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처음 샹카네가 라스르푸울에 와서  자스비아의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자스비아는 집앞에서 놀고 있었다. 문득 길 저쪽을 바라보던 그는 표정이싹 변하더니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갔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해?"
  그의 형이 물었다.
  "응, 큰일났어. 나의 아버지가 왔어, 베디 마을에서 온 거야."
  자스비아는 숨을 헐떡이고  목소리가 들떠서 대답하고는 집안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급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시니까 얼른 바라문의 식사를 준비해 주어요!"
  이때 샹카와 함께 라스르푸울을 방문한 이는 라므의 동생과 숙부였는데 자스비아는 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또 전생의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더니,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바르슈와르다"고 했다. 아들이있었다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말했지만 이름을 말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뒤에 차기 가(家)에서는 여러가지로 노력하여  자스비아를 베디마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가 차기 가의 사람들에게 보인 친근감을 보고는 아들을 차기가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염려에서 그의 베디행을 어렵게 승락하였다.  자스비아는 여러 날 동안차기 가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을 분간해보였다. 농장으로 안내되어서는구획이 많이 나있는 밭들 속에서  정확하게 차기 가의 것을  지적했다.그리고 아들인 바르슈와르에 대해서는  특히 강렬한 애정을 표시하면서한 침대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바르슈와르가 학교에 가고 안보이자 아들이 없어진 데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1957년의 첫방문 이후로 자스비아는 베디 마을에 가기를 퍽 좋아하였고  다시라르 가(家)에서  데리러오면 언제나 울면서 반항하였다.
  자스비아는 그가 세살 반이었을 때, 한 때 죽어 있던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므)는  육체를 상실하고 있는 동안에  영계(靈界)에서 한 성자(聖者)를 만났는데, 그 성자가 나에게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의 육체 속에 숨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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